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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14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한 인간을 둘러싼 300년 신화의 가면 벗기기

2010 Development Program: 14th Letter


 이덕일 역사서


우암 송시열은 누구인가?

1.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2. 남인이다.
3. 율곡 이이의 학풍을 잇는다.
4. 당쟁의 역사를 대변하는 정치인이다.
5. 주자학을 신봉한다.
6.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대해 무한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고집이 세다.
7. 60세에 대성하게 환갑잔치를 했던 시절에 83세까지 살았다. 그것도 83세에 사사되었다.

송시열은 자신의 정치적 위치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높아지는 것을 알았다. 송시열은 생애 조정으로부터 167회 부름을 받았으며, 단 37회만 그에 응하였다. 우의정과 좌의정은 3번 하였는데 실질적으로 정승 업무를 수행한 기간은 단 49일에 불과하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후진 양성에 투자하였다.

아래의 박스에는 송시열이 거쳐갔던 벼슬들이 진하게 표시되어있다. 경릉참봉, 세자시강원진선, 집의, 좌참찬, 우찬성, 우의정, 또 우의정, 좌의정, 중추부영사... 그는 서인의 대표적인 학자였고 조직을 이끄는 유력한 정치인이였다.

(1) 성군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반정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2) 그릇이 부족한 인조가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를 죽음으로 몬 이유는 무엇인가?
(3) 더불어 손자들까지 제주도로 멸해 소현세자 가족을 모두 죽인 이유는 무엇인가?

송시열은 위의 사건과 관계가 없다. 다만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송시열이 가르쳤던 효종(봉림대군)이 왕위에 즉위하게 된다. 또한 왕실의 법도를 어기고 효종이 즉위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정통성 논쟁에 해당되는 예송논쟁을 맞이하게 된 것 역시 필연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김자점이 청나라에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다고 밀고함으로써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지목받아 청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그뒤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이 많았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이 책의 문제의식은 후세의 송시열의 평가에 관한 의구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송시열의 생애와 사후, 조선의 집권당은 노론이였으며 집권당의 당수인 송시열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이기 힘들다는 말이다. 역사란 항상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지지 않던가?

송시열은 현재 대한민국을 부패하게 만들고 병폐하게 만든 시조라고 생각한다. 그의 생애에 그의 가치관과 신념때문에 당쟁이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는 방향으로 발달하였다. 국익보다 당의 이익, 개인의 이익이 우선시 하는 당쟁이...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접근보다는 개인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당쟁이 과연 도덕적으로, 우암선생이 따랐던 유교적 관점에서 좇아야 하는 것이 맞는가?

효종, 숙종 시대의 당쟁의 중심에 있었던 송시열과 당쟁의 대표적 사건인 예송논쟁... 어쩌면 이 잘못된 과거는 송시열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한국인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또는 도덕에 대한 개념은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사상 혹은 가치관을 유연하게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람들은 실리추구보다는 정신적 행복이 우선인가?
성리학이라는 것이 밥을 먹여주는가? (= 무조건적인 인문학 연구가 추앙받아야 하는가?) 
사대부가 있어야 나라가 있는가,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는가?

글쎄... 과거와 현재의 consensus는 다르다. 과거에는 성리학이 지배하는 세상이였고, 인종차별에 해당되는 오랑캐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의 역사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역사에 대한 얘기 때문에 말이 길어졌다. 

다시 송시열 얘기로 넘어가서 마무리를 하자. 송시열이라는 사람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교과서에서도 대 학자라는 정도의 기록밖에 없으며, 그가 대체 대한민국 사회에 남긴 것이 무엇인지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피드백이 부족하다.

현재의 문제는 과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현세의 문제는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학구열이 높다고 하지만, 쓸데없는 곳에 힘을 쓸 뿐 현실적으로 고민과 해결이 필요한 문제에 대한 의식공유와 문제 해결 노력이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건 아닐까?

너무 앞서간건지 모르겠다. 한 줄 요약을 하자면 현대 정치판을 300년 전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Posted by 힐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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